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살라흐 앗 딘 유수프 (문단 편집) == 인품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file.mk.co.kr/image_readtop_2011_154872_1299818121390403.jpg|width=100%]]}}} || || '''{{{#000 살라딘이라고 추정되는 그림 }}}''' || [[가톨릭]]에서 보면 압도적인 적의 수괴였지만, 놀랍게도 당시 가톨릭 세계에도 [[호적수]]로써 좋은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관련 소설《Amulet》등을 보면 십자군의 누구보다도 신사적이고 기사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에서도 살라흐 앗 딘을 지옥이 아닌 [[림보#s-1.1|림보]]에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신곡에서 림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처럼 (기독교의) [[야훼|하느님]]을 알지 못 한 위대한 인물들이 지내는 곳이다.] 또 3차 십자군 이전까지는 적인 십자군 포로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기록자인 [[기욤 드 티레]]는 그의 관용함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그 관용에서 나오는 문제를 크게 묶어 까는 것을 잊지 않았고, 어떤 [[수도자]]의 기록에서는 '''[[적그리스도]]가 오기 전의 마지막 재앙''' 중 한 명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특히 그 시기에 나온 살라흐 앗 딘을 그린 기록을 본다면 푸른 피부를 가진 악마처럼 그리는 기록도 있다. 즉, 살라흐 앗 딘이 호의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한 건 엄연히 3차 십자군 전쟁 이후라는 것. 이에 대해서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승리를 과장하기 위해 일부러 상대를 과장한 면도 있다는 해석도 있다. 살라흐 앗 딘의 누이를 포함한 민간인들을 공격하였으며 메카와 메디나까지 약탈하려고 시도했던 [[르노 드 샤티용]]은 예루살렘 탈환에 큰 영향을 준 전투인 하틴 전투가 끝난 후, 살라흐 앗 딘에게 직접 처형당했지만, 이 경우에는 르노가 그동안 끌어온 어그로가 많아 그렇게까지 비판받지 않는다. 예외적으로 [[성전기사단]]이나 [[구호기사단]]은 거의 대부분 처형했는데, 이들은 침략자들의 앞잡이이자 존재 자체가 이슬람 세계에 위협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무장친위대]]나 소련의 [[정치장교]], 영국의 [[코만도]]가 유독 가혹하게 처분받은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당시 [[유럽]]의 [[음유시인]]들의 작품을 보면 가관인데 [[리처드 1세]]에게 호의적인 작품엔 살라딘은 흑마법사를 동원해 악령을 말로 만들어 리처드에게 선물로 주는 등의 꼼수를 부리다 도망가는 게 일이다.(...) 프랑스에게 적대적인 작품엔 2차 십자군 당시 [[아키텐의 엘레오노르|프랑스 왕비]]가 게으름 부리는 프랑스 왕에게 실망하고 용맹한 살라딘에게 반해 청혼하려다 붙잡힌다.[* 근데 실제로는 2차 십자군 당시 살라딘은 고작 10살 짜리였기에 종교고 자시고 청혼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며 엘레오노르도 그의 존재를 알 수가 없다.] 어떤 작품에서는 살라딘은 호기심에 포로로 잡힌 트리폴리 백작의 아들에게 기사 작위를 받으려 한다. 트리폴리 백작의 아들은 이교도에게 기사 작위를 줄 수 없다고 거부하지만, 포로 신세에 살라딘 자신에게 강요받아 기사 작위를 줬다고 하면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란 말에 살라딘에게 기사 작위를 내린다. 목욕을 하고, 흰 옷을 입는 등 기사 작위식을 받는 동안 살라딘은 의식 하나 하나에 진심으로 감탄하여 기사 작위식을 끝낼 무렵엔 프랑크 의식을 가진 진정한 기사가 된다. 개중 압권인 것은 살라딘이 죽기 직전 스스로에게 프랑스어로 [[세례성사]]를 주어 기독교인으로서 죽고 예루살렘에 묻혔다는 것. 그러나 풀려난 포로들이 곱게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부분 다시 십자군에 합류해서 살라흐 앗 딘과 싸웠기 때문에, 이 점에서는 가톨릭 측에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 무슬림들 쪽에서는 무자비한 [[바이바르스]]를 더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살라흐 앗 딘도 사람인지라 리처드를 상대로 고전할 때에는 포로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고 죽였다.[* [[리처드 1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리처드가 이슬람 군의 전열을 마구 뭉개버리자, 이를 보던 살라흐 앗 딘이 어이가 없어 '''"저 녀석이 사탄 아님?"'''이라는 농담을 던진 슬픈 일화가 있다(...)] 심지어 포로로 잡힌 십자군 기사들 중 여성이 있었는데도 같이 죽여버리라고 했을 정도. 그나마 갑옷을 벗기기 전엔 여성인 줄도 몰랐다고 한다. 사실 살라흐 앗 딘은 [[19세기]] 이후 '''반(反) [[식민지]] 운동'''에 의해 유명해진 면도 있다. 살라흐 앗 딘의 네임밸류는 적이었던 유럽인들에게는 유명했을 뿐, 19세기 이전까지 이슬람 세계에서는 그렇게까지 인기가 많은 영웅은 아니었던 듯하다. 유럽 열강이 이슬람 세계를 야금야금 정복, 일제 치하의 우리가 그랬듯이 과거의 영웅이 재발견된 것이다. 물론 유럽에서는 여전히 유명했지만...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던 영웅은 [[몽골]]의 침략을 막아낸 [[바이바르스]]였다. [[소수민족]]인 [[쿠르드족]] 출신의 영웅 따위... 사실 같은 시기에 진정한 지하드를 이끄는 사람으로서의 위용은 살라딘의 '''선구자''' 격인 [[누르 앗 딘]]이 압도적으로 고평가 받았을 정도. 재미있는 점은, 정치적인 행보에서 살라흐 앗 딘과 누르 앗 딘은 큰 차이점을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두 사람 다 자신의 군사 행동을 [[지하드]]임을 강조했고, 점령한 지역에 [[이슬람]]식 정치 및 교육 체계를 확고히 하는 데 힘을 썼다. 십자군 원정 당시에는 무슬림들 사이에서 좋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살라흐 앗 딘의 온정을 '''연약함'''으로 표현하고 저항하는 적군을 보내준 것을 겁을 먹은 것이라고 깠던 것이다. 이는 기존의 지배자였던 누르 앗 딘의 세력을 흡수한 살라흐 앗 딘을 왕위 찬탈자라고 간주하던, 누르 앗 딘 계열 역사가들의 감정이 이입된 경우다. 대표적인 인물이 모술의 이븐 알 아시르. >누르 앗 딘은 그 관대함이 살라흐 앗 딘에 맞먹는 정도였는데, 어느 정도냐면 아내가 1년에 겨우 20디나르 먹고선 살아갈 수 없다며 부부싸움을 벌인 기록이 있다. 누르 앗 딘은 3개의 가게를 갖고 있었지만 그 매상에서 나오는 수익이 1년에 겨우 20디나르였던 것이다. 아내가 투정하자 누르 앗 딘은 말했다. "그 외에 어떻게 돈을 벌어오란 말이오? 비록 나는 돈을 쓰는 것을 명령하는 입장이지만, 나는 단지 무슬림들의 보물 창고일 뿐이오. 난 그들을 배신할 수 없고, 아내의 투정 때문에 지옥불에 떨어지고 싶진 않소." >---- >이븐 알 아시르 살라흐 앗 딘은 또한 정과 눈물이 많은 다정다감한 성격이었는데 대표적인 일화로 프랑크족 여인의 아이가 유괴되어 [[노예시장]]에 팔려가자 사연을 들은 살라흐 앗 딘이 [[노예시장]]에 [[기병]]들을 보내 아이를 찾아오게 한 것이다. 여인은 눈물을 쏟으며 크게 감사하였다고 한다. 또한, 예루살렘 공성전 당시에는 [[이벨린의 발리앙]]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도록 허용해서 예루살렘 방어전을 지휘하게 했다. 사실 이건 방어전을 지휘하라고 들여보낸 것은 아니다. 발리앙은 어디까지나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고 예루살렘에서 살라흐 앗 딘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었다. 그러나 마땅한 지휘관이 없던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발리앙에게 살라흐 앗 딘과 맞서도록 설득했고, 발리앙은 이에 대해 사과 편지를 보내면서 다시 자기 가족들은 예루살렘에서 나가도록 통행을 허용해 달라고 했다. 약속을 깬 측의 뻔뻔스러운 부탁이었지만 살라흐 앗 딘은 발리앙의 아내가 타고 갈 말을 보내주는 것으로 답했다. 살라흐 앗 딘은 예루살렘을 함락한 후에도 예루살렘의 가톨릭교인들을 약간의 몸값만으로 도피할 수 있게 허가해주었고, 그것도 병자나 노인, 아이 등은 무료로 보내줬다. 몸값이 부족한 사람에 대해서는 자신이 직접 몸값을 내어주기도 했다고. 게다가 계속되는 예루살렘 왕국의 무리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무료로 보내주었고, 가는 길에 노잣돈까지 쥐어주었다. 그래서 "예루살렘 대주교는 막대한 재산을 싹싹 긁어서 떠나는데[* 실제로는 가톨릭 고위 사제로서 성물을 함부로 내버려 둘 수 없기에 (가톨릭에서 성물의 가치는 그야말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며 실제로 판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가지고 간 것이었으며, 대주교 본인 자체는 직접 인질이 될 것을 자청했으며 발리앙과 함께 포로들의 몸값 마련을 위해 직접 동분서주 했을 정도의 대인배였다.], 그놈에게까지 낮은 몸값을 받고 호위병을 붙여줘야 하느냐?!"는 등 무슬림들 반발이 심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00년쯤 후에 아크레를 점령한 [[바이바르스]]는 반대로 이 도시에 살던 십자군이나 가톨릭교인들을 다 죽이거나 노예로 팔아버리면서 살라흐 앗 딘의 관대함이 결국 나중에 무슬림들의 피를 흘리게 한 어리석은 행위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 중 특히 '''[[나는 관대하다|짐은 관대하다.]]''' 급의 포스를 풍기는 예는 다음과 같다. >살라흐 앗 딘은 격무에 지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한 '''노예'''([[맘루크]])가 와서 서류를 내밀고 서명을 요구했다. 살라흐 앗 딘은 "나는 너무 지쳤다, 나중에 다시 와라"라고 말했지만, 맘루크는 물러서지 않고 "지금 서명해야 합니다!" 하며 '''서류를 살라흐 앗 딘의 코 앞까지 밀고 흔들며 재촉했다'''. 살라흐 앗 딘은 궁여지책으로 "잉크가 없어서 서명할 수가 없잖아." 라고 말했고, 맘루크는 "저기, 잉크병 있잖아요" 하고 응수했다. 살라흐 앗 딘은 마지 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아!! 잉크병이 저기 있었구만..."이라며 '''손수 잉크병을 들고 와 서명을 했다.''' >---- >바하 알 딘, 살라흐 앗 딘의 비서.[* 이 일화를 기록한 비서조차도 왕이 직접 잉크병 가져오는 것을 멀뚱멀뚱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의 [[맘루크]]를 말 그대로의 노예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맘루크가 원래 노예 계급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오히려 신분이 미천하고 정통성이 부족하여 반란을 통해 권력을 잡지 못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친위대로 각광을 받아왔다.[* 대부분 이슬람교로 개종시킨 중앙아시아인이나 슬라브인으로 구성되었고, 아예 기독교도 출신 기사들을 근위병으로 고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군주의 친위대 역할을 수행해야 하니 이들은 철저하게 군사훈련을 받았고, 전쟁이 거듭되는 사이 군인 노예로 큰 군사적 힘을 지니게 되어 일종의 특권계층으로 발전하며 [[노예 왕조|인도]]나 [[맘루크 왕조|이집트]]에선 아예 왕권을 잡을 정도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맘루크를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일개 노예로 보는 것은 오류. 굳이 맘루크가 아니더라도 전근대 군주의 직속 노예는 어느 국가에서나 미천한 지위가 아니다. 그렇다 해도 신하가 군주를 저렇게 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살라흐 앗 딘 치하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당장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상사에게 이따위로 요구를 했다가는 욕설과 날라차기가 날아올 것이다. 전근대임을 감안해도 엄청난 것. 또 그의 관용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어느 겨울날, 어떤 사람이 온실에서 기른 장미꽃 한 바구니[* 방을 장식해줬다고도 한다.]를 살라흐 앗 딘에게 바치자 감동한 살라흐 앗 딘이 2백 브장([[https://en.wikipedia.org/wiki/Bezant|Bezant]])[* 당시에 통용되던 [[비잔티움]] [[은화]].]을 그 사람에게 하사하겠다며 왕실 재정관에게 명하여 즉시 [[어음]]을 끊게 했는데, 실수로 2백 브장이 아닌 3백 브장으로 기재하였고 실수를 알아차린 재정관이 즉시 잘못 기재한 어음을 파기하고 다시 지급하려 하자, "아니, 그럴 것 없다. '''4백 브장 짜리로 다시 끊으라. 그대의 펜이 나보다 더 후해서야 되겠느냐.'''"라면서 오히려 가격을 올려 하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